다른 삶을 마주하며 나를 묻다
대학원 동기를 만났다. 그녀는 90년생이며 두 아이의 엄마이고, 의사 남편을 둔 중상층의 주부다. 내 기준에서 화려한 이력을 가진 그녀는 몇 년간의 경력 단절을 거쳐 대학원에 입학했다. 나와는 다른 삶을 살아온 그녀였지만, 늘 바쁘게 살아가는 나를 보며 대단하다고 말해주는 그녀와의 만남은 편안하고 즐겁다.
최근에는 아이들 교육 문제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자유로운 교육관을 가진 나로서는 주말부부까지 감수하며 아이들을 국제학교에 보내기 위해 먼 도시로 이사하려는 그녀의 결정이 쉽게 이해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이들만을 생각하며 단순하고 분명하게 선택하는 그녀의 모습이 가끔은 부럽기도 했다.
반대로 그녀는 나의 자유로움과 나만의 단순함을 부러워했다. 나는 아이들을 키우는 과정에서 믿고 기다려주는 편이라, 내 아이들은 늘 날것 그대로다. 가끔은 그 모습이 부끄럽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낯선 환경에서도 스스로 적응해 나가는 아이들을 보면 내가 틀리지 않았다는 안도감이 든다. 미국에서 아이들을 키우는 것이 최종 목표인 그녀에게는 이미 미국에서 건강하게 지내고 있는 우리 아이들의 모습이 좋아 보였던 듯하다.
아이들은 저마다 다른 기질을 지니고 있기에 누구에게나 통하는 양육의 정답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녀에게도 특별한 조언을 건네기보다는 내가 아이들을 키우며 느꼈던 경험을 조심스레 전했다. 양육에는 적절한 통제와 자유의 균형이 필요하고, 그 기준은 아이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결국 부모는 자신의 자녀를 가장 가까이에서 잘 관찰하고 그 아이만의 특성을 이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여전히 그 과정을 배우고 있는 중이다.
아이를 언제까지, 어디까지 양육해야 하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부모가 아이를 충분히 사랑하고 믿어주는 일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결국 믿어주는 만큼 스스로 자라날 수 있다는 것을 지켜보는 일이 아닐까.
문득 '나는 내 아이를 얼마나 믿고 있지' 또한 '나 자신은 얼마나 믿고 있는지' 생각하게 된다.